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호남 지역갈등 (문단 편집) ==== [[조선시대]] 등장설 ==== [[파일:택리지.jpg]] >全羅道則專尙狡險易動以非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하고 교활하여 나쁜일에 쉽게 움직인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보관 택리지 한편 [[조선시대]]에도 [[택리지]], [[동국여지승람]], 임관정요 등 당시 기록을 근거로 이때에도 호남 지역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관찬 지리서로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서는 이런 평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택리지의 경우에는 지역에 대한 평판이 기록되어있는데, 그런 기록들을 다 따져보자면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나쁘게 평가한 기록들이 있으니 모든 지역들이 다 차별을 당한 셈이 된다. 조선시대의 문인 [[황상]]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반박하면서, "세상에서는 호남을 속이고 경박하다고 하지만"이라고 표현하여,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중환은 남인 강경파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로서 처가인 목씨 일가와 함께 남인과 협조적이었던 소론 강경파에 끼어들어간 탓에, 목호룡 사건과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몰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이중환이 전라도와 평안도를 가보지는 못했다면서 풍수적으로 비판한건 객관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택리지는 정치색도 강해서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서인지 왕실의 관향인 전주는 한양과 다를 바가 없고, 기운이 맑다고 극찬하는 등 택리지는 이런저런 정치적 계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택리지는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많은 이본(異本)들이 나왔는데 필사할 때마다 본인 마음에 안들면 글을 바꾸는 경우도 많아서 택리지 이본만 200여 종이 넘는다. 사실 이중환이 직접 쓴 택리지 원본과 수정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영조 치세에 벼슬을 지낸 문신 성대중[* [[서얼]] 출신으로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영조 임금을 배알해 덕담("하관이 [[강태공]]처럼 든든하고 좋다")을 듣기도 하였다.]이 쓴 <청성잡기>에는 사화로 인해 화를 입어 죽게 된 사대부 가문 여인이 '''(특정 붕당을 위해 죽으니)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하는 대목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런 붕당의 폐해로 인해 공직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이중환의 사견이 들어갔을 가능성 역시 감안하고 걸러서 봐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조선시대때는 영남학파가 많은 [[동인(조선)|동인]]([[북인]], [[남인]])에도 호남 사람들이 많았으며, 일례로 정여립의 난 당시 호남 유림과 영남 유림들이 1000여 명이 엮여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은 선비들이 큰 화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우에는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 시절에 자기네 지역 출신 사림들이 조정에서 주류 세력으로 형성해서 권세를 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경상도나 전라도 역시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혔다. 그 대신 그 자리를 경기와 충청 출신 사림들이 주류 세력이 되어서 관직을 독차지했다. 물론 [[정여립의 난]]과 [[이인좌의 난]]때 [[반역향]]에 찍혀서 조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례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광해군 시절의 빈번했던 옥사와 인조반정와 이괄의 난때 전례가 없는 숙청 때문이었으며, 이때부터 영남과 호남 출신의 관리 수는 줄게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경기나 충청 출신 말고도 경상(영남)이나 전라(호남) 출신이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고 오히려 [[효종(조선)|효종]] 시절에는 서인의 지분은 경기와 충청 출신으로 대부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영호남 백성들간 사이는 오히려 친한 편이었고, 또한 조선시대에 지역 비하 기록은 풍수지리나 설담 등에 근거였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으며, 또한 이런 지역적 편견은 책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에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지배층 및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생각을 하시면 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독 전라도의 풍습이 다른 도와는 다르다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성종실록>> 14년 3월 27일 2번째 기사 > >"전라도 백성들의 풍속은 다른 도와 비교할 것이 아니어서 옛부터 성질이 완악하였으니 >다만 미천한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품관의 무리들도 시골에서 세력을 부리어.."[[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03027_002|#]] ><<명종실록>> 2년 10월 14일 4번째 기사 > >"전라도는 인심과 풍속이 다른 도와 크게 달라서, 무뢰배들이 친고라 청탁하여 >청탁과 공갈을 하여 폐단을 일으키고.."[[http://sillok.history.go.kr/id/kma_10210014_004|#]] ><<성종실록>> 6년 5월 17일 4번째 기사 > >"전라도는 인심이 각박하고 악하여 도둑이 무리져서 일어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일이 흔합니다. 풍속은 백년동안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으므로.." >"고려[前朝] 5백 년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가 되어도서도 거의 1백 년이 되었으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 완악(頑惡)하니, 명심하고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5017_004|#]] ><<명종실록>> 6년 8월 4일 3번째 기사 > >"전라도는 인심이 사나우며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그 도의 감사로 반드시 명먕과 지위가 높은 사람을 파견한 연후라야 민심을 진압할 수 있을것입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608004_003|#]] ><<선조실록>> 21년 6월 1일 2번째 기사 > >"다만 호남은 풍속이 다른 곳과 달라서 관리를 혁파하는 일이 주민의 소에 의해 한번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06101_002|#]] ><<명종실록>>11년 1월 21일 3번째 기사 > >"호남은 인심이 완고하고 사나워서 비록 조그마한 혐의라 하더라도 꼭 그 부모의 무덤을 파헤치는데 >그런 풍조는 고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1101021_003|#]] ><<광해실록>> 10년 7월 11일 9번째 기사 > >왕이 이르기를 >"호남은 인심히 착하지 않아서 매양 근심스럽고 두렵다.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방도를 경이 마땅히 십분 살펴서 시행하라"[[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7011_009|#]] ><<영조실록>> 38년 7월 20일 2번째 기사 > >"호남의 풍속은 좌도로써 진출하는 자가 많았고, 속임수가 백출하여 을해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흉적들이 연달아 나왔으니 ,국가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7020_002|#]] ><<예종실록>> 1년 5월 2일 3번째 기사 > >"하물며 전라도 한 도는 본래 백제의 옛 땅으로 인심이 박악하기가 다른 도의 배가 되니, >만약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금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5002_003|#]] ><<선조실록>> 27년 6월 26일 1번째 기사 > >"호남은 인심이 본디 나쁩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6026_001|#]] ><<광해실록>> 9년 10월 19일 1번째 기사 > >"호남은 인심이 고약하고 선비들의 습성이 아름답지 못합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0019_001|#]] ><<성종실록>> 13년 4월 5일 1번째 기사 > >"전라도의 풍속이 본래 사납고 악하여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형이 이 도에서 많이 나오게 되니, 중죄로 논하는 것이 옳을것 같습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304005_001|#]] ><<성종실록>> 19년 1월 27일 1번쨰 기사 > >"전라도의 풍속은 본래부터 야박하고 악독하다고들 하고 있습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1027_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